조병오 사장이 GNS고객 및 가족에게 드리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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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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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회보'에는 회사 다닐 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란 콘텐츠로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있다.

금년 봄호에 저의 이야기가 아래의 내용으로 수록되었다.

그동안 이 콘텐츠에는 성공적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이야기로 채워왔지만

나의 아래의 내용은 실패사례가 되어 조금은 쑥스럽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시련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라 하게 되었지만

단기간 내에 중국의 노사문제를 공부하고 평생의 좋은 경험이었기에 소개합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조병오




(삼성그룹 퇴임 임원 모임의 '성우회보' 2015년 봄호 표지)


나는 회사(삼성)생활 28년 중, 90년대에 중국에서 2년 반쯤 주재생활을 한 적이 있다.

중국과 막 수교한(‘92년) 직후였으며, 삼성전자 제조기지가 중국에 막 시작할 즈음에

당시 국내에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오디오 제품을 살려야한다는 과제를 가지고

중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웬만하면 천진에 해야 한다는 위로부터의 지시가 있어서 집중적으로 검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수출 물류가 좋고 부품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

그래서 일본계·대만계 오디오 회사들이 한결같이 광동성에 자리잡고 있어서

나의 속 마음은 일찍부터 화남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천진으로부터 시작된 출장걸음은 광동성의 주해, 심천, 동관 등 주요도시를

자세히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천진에는 TV와 VCR, 전기, 모직이 진출했거나 진출을 확정하고 건설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오디오의 중국생산법인은 혜주(SEHZ법인)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SEHZ의 투자조인식 : 필자와 혜주시장)


당시로선 오지로 지칭이 되던 혜주로 선정된 배경은 이러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디오의 인프라가 우수한 광동성 지역은 필연이었으며,

상대적으로 여러가지 조건이 좋았던 심천과 동관에서는 내수판매 허가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오디오 회사들이 진출하여 오디오 제품은 그들에게 관심 밖의 사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혜주시정부를 통하여 어렵사리 생산품의 15%까지는 중국 내에 판매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까지 승인을 받은 후에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SEHZ는 천진쪽의 TV, VCR보다 일찍

법인등록이 되어 삼성전자 중국1호 법인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SEHZ는 중국 남쪽의 삼성전자 유일한 회사가 되어

초창기 중국 개방의 혜택을 누렸으며, 아직도 IT의 경쟁력에서 휼륭한 인프라가 주변에 잘 갖추어 있고

잘 훈련된 우수 인력을 보유하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조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삼성전자 해외 최고의 법인으로 유지·발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품 생산 100만대 돌파기념)


적은 투자로 혜주시정부와 합작으로 시작된 이 회사는,

초창기 오디오 제품을 지금까지 생산함은 물론 모니터와 휴대폰 전문생산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지공선사(지하철 공짜)가 되어 그때를 되돌아보면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힘들고 나쁜 기억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기에 이렇게 서론이 긴 것인가?

'삼성의 해외노사분규 제일호'라는 제목으로 당시 국민일보 홍콩특파원의 기사가 일간지에 등장했다.

발생장소가 내가 법인장으로 있는 SEHZ(혜주삼성전자)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망설임이 생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등 격려의 말도 있긴 하지만,

이제는 잊혀진 20년 전의 사고를 들추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당시 주재원들의 명예에 아픔만 더하게 할 뿐이며,

크게 변한 경영환경 탓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지금 참고가 될 수도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다시 되돌아 보는 것은 “시련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라는 말대로

이제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95년 1월이었다. 당시 나는 전사전략회의 참석차 한국 본사에 출근해 있었는데

중점대학 출신 20여 명이 주동이 되어 근로조건 개선을 이유로 반나절을 태업한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회사발전을 위해 역할을 하도록 키워왔던 일류직원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급히 귀임하여 수습을 진행할 때 그들은 본인들이 한 행위가 그렇게 심각한 줄 모르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공회(노조)가 없는 회사에서 의사표현 방법으로 보통 그렇게 한단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물론 신문기자의 과장된 내용도 없지는 않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노동환경 문화도 모르고,

또한 삼성의 노사관계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초기 건설과 생산에만 몰두하였다는

무지함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였는가?”에서부터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본사는 물론 그룹 노사팀의 지원을 받아서 결자해지結者解之하라는 당시 K 사장의 배려(?)로

일 년간 정말 기초를 다시 다지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동자의 처리와 전체 종업원들의 어수선했던 마음관리,

작업장의 시설보완, 기숙사·식당의 개선, 휴식공간과 운동장의 확장 등

실로 하루종일 근무하면서도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 되어 대책을 만들고 실행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디오 제품 생산을 위한 최적지로 가능성이 확인된 이 사업장을

지금의 일로 좌절해서는 안 됨은 물론 회사에 대한 믿음과 비전을 종업원들에게 보여주어야한다는

계획 하에 경영개선을 위해 그야말로 불철주야 힘을 기울였다.

수습과정으로부터 경영정상화, 특히 노사관계의 신뢰를 찾기까지의 많은 활동내역을

여기에서 모두 거론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듯하다.

다만 한번 흐트러진 노사관계를 재정립하고 회사의 분위기를 활력있게 복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주재원, 전직원들의 기초 다지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겨웠고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후 일 년의 정리기간을 마치고 귀임하게 되었다.

귀임 후에 건강검진에서 병이 생겼단다.

다행히 초기상태의 조기발견으로 바로 치료를 할 수 있었으며

연수원 및 해외 다른 지역사업장의 '실패사례 연사'로 불려다녔던 것 조차도 좋은 추억이 되곤 하였다.

의욕과 정열만으로 밀어부치는 것에 익숙했던 시절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으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최근 SEHZ 전경)


또한 나의 이런 업무 실패에도 지금까지 원만히 잘 살아왔음에 감사하고

회사나 주변 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지자막여복자知者莫如福者라는 말을 믿고 좋아한다.

더욱이나 “시련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라는 말에 더욱 공감하고

그야말로 고생,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자.


끝으로 나에게 결자해지의 기간을 준 회사와 단 몇개월 만에 회사를 정상화시키고,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여러 관계 부서에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SEHZ를 삼성전자 해외 최고의 생산 법인으로 성장시킨 후배 법인장들과

주재원 및 직원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배경음악 : '조영남'의 '모란동백'